층간소음(2/2)
다시 한 달 뒤.
전날에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나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과도하게 예민할지도 모른다. 막대한 대출도 그렇고 직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져 소음에 과민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객관적 자료를 수집하기로 했다. 내가 예민한 거라면 이번 기회에 마음을 다잡고 고치는 계기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층간소음 분쟁위원회>에 상담 및 소음 측정을 의뢰했다.
이번 층간소음 사건은 대략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민원이 많이 쌓여서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단계 사이사이에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며 기간을 조금 두어서 더 오래 걸렸지만, 바로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면 한 달 정도면 측정까지 충분할 것 같다.(http://www.noiseinfo.or.kr/floorinfo/info.do)
국가소음정보시스템
www.noiseinfo.or.kr
- 관리사무실에 연락
- 삼자대면(윗집, 아랫집, 관리소장님)
- 층간소음 분쟁위원회에 상담 신청
- 삼자대면(분쟁위원회, 관리소장님, 신청자)
- 층간소음 이웃사이 센터에 층간소음 측정 신청
- 층간소음 측정
- 측정 결과 공유
- 재판
지금의 아파트는 30년 전에 지어진 벽식 구조로, 층간 두께(슬라브 두께)도 얇아 윗집의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때문에 소음측정의 기준도 더 높았다. 윗집의 생활할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권리와 권리가 부딪힐 때에는 당연히 피해받는 쪽을 보호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은 차분히 측정을 기다렸다. 이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 윗집의 문을 두드리고 싶었지만 아내가 현명하게 타일러주었다.
신청 후 약 3주 뒤, 측정일에는 집을 비워야 했기에 우리는 아내의 직장 근처 호텔에 묵었다. 층간소음 덕에 호텔행이라니... 삶은 역시 새옹지마다.
측정 후 약 2주 뒤, 윗집이 객관적으로도 시끄럽다는 것을 말해주는 결과서가 도착하였고, 나는 아내와 대화 후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그날 저녁, 퇴근길에 동네가 소란스러웠는데 자세히 보니 온 주민이 복도로 나와 있었다. 화재경보기가 울렸는데 윗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딱히 불이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걱정됐다.
이윽고 경비아저씨께서 달려와 윗집의 문을 두드렸지만 현관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렸다. 분명 밖에서 보았을 때 윗집의 불은 켜져 있었다.
그때 옆집 주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저러네... 도통 문을 안 열어."
이웃분께 자초지종을 여쭤보니 원래 소통이 잘 안 되는 집이라면서 아이들도 버릇이 없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아,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구나...
대략 5분 후, 윗집의 문이 열렸고 경비아저씨께서는 이상이 없음을 파악하시고는 돌아 나오셨다. 다행히 오래된 경보기의 오작동이라고 하셨다. 나는 계단으로 내려오시는 경비아저씨께 슬쩍 다가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윗집... 10시 넘어서는 조용히 좀 해달라고 전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잠을 제대로 못 자서요..."
경비아저씨께서는 나를 슬쩍 보시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전에 살던 아가씨도 여덟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 갔는데, 같은 문제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 말을 듣자 나는 현기증이 났다... 분명 부동산에서 옛날 집이라 불편한 게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게 이걸 말했나 보다. 지난 반년 동안 보일러도 터지고 천장에서 물이 샜기에 그저 그걸 의미하는 줄로만 알았다. 복비도 거의 상한선에 맞춰서 냈건만...
깊이 좌절하는 나를 보며 경비아저씨께서는 살짝 웃음을 지으시고는 말씀을 이으셨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요. 다음 달에 이사 간대요."
세상에... 이렇게 기쁜 일이!!!
로또 4등에 당첨되었을 때보다 더한 기쁨이 몰려왔다. 아마 3등이 되었어도 이보다는 기쁨이 덜했을 테다.
나는 경비아저씨께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아내 또한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말을 듣자마자 환호를 질렀다. 그건 마치 배달 음식이 도착했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한동안 주위에서 결혼생활이 어떤지 물을 때면 층간소음으로 힘들다고 답했는데 회사 선배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결혼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층간 소음인 거면 괜찮은 편인데요?"
그렇다. 막상 잠을 잘 못 자고 출근할 때에는 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생활이 나름 순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렴, 층간소음으로 이성의 끈이 놓일 것 같을 때마다 나를 잘 타일러주던 현명한 아내가 아니던가. 순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연속된 순간들의 화를 참지 못하고 윗집에 찾아갔었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좋게 끝나긴 어려웠을 거다. 매체에서 층간소음과 관련된 범죄를 접할 때마다 저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너무도 공감한다. 폭력은 답이 될 수 없지만서도 내가 운이 나빠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가 없었다면 나 또한 우퍼 스피커를 주문했을 것이다. 실제로 보복 소음을 위해 우퍼 스피커를 장바구니에 담기까지 했고, 아내에게 사면 안되냐고 수도 없이 물었다. 다만, 윗집의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될까봐 실행하진 못했지만 윗집의 부모가 많이 미웠다.
22년이 되어 새롭게 이사 오신 이웃분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생활 소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밤 10시 이후에 시끄럽지는 않고, 이 정도 생활 소음이야 아파트에 살면 자연스러운 것이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잠이 주는 행복이 이렇게나 큰 줄 이를 잃어보니 알 수 있었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층간소음으로 인해 열 달 정도 고생하긴 했지만, 소중한 일상에 감사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다음에 집을 고를 때는 반드시 윗집의 가족 구성원과 계약 만료일(또는 계약 형태), 그리고 건축물의 슬라브 두께를 더욱 꼼꼼하게 확인해야겠다. 코로나로 외출이 드물어 아직까지는 엘리베이터에서조차 윗집 이웃분을 마주친 적이 없지만, 언제고 마주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드려야겠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운이고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