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 보름살이 - 2일차
여전히 땅은 젖어있었고, 정말이지 비오는 월요일 아침은 아직까지도 버겁다.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집에서 챙겨 온 삶은 달걀과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노트북을 켰다. 사내 메신저에는 주말 동안 다른 팀으로부터 넘어온 여러 업무 관련 질의가 있었는데 하나 같이 급건이라는 태그가 달려있었다. 인간적으로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주말에도 고객은 서비스를 이용하고 문제는 발생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모니터 연결선을 가져오지 않아 조그만 노트북으로 업무를 본 탓에 제대로 효율이 나질 않았다. 그냥 비가 와서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메신저 오류 때문인지 연결이 안정치 못해 진행이 더뎠다. 답답함을 달래고자 고개를 돌린 창밖으로 멀리 바다가 보였고, 그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 생선 구이집이 있었다. 점심으로 생선 구이를 먹을 생각에 조금은 힘이 났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시간 맞춰 밖으로 나왔다. 아까 보았던 간판을 향해 걷자 그리 오래되지 않은 느낌의 가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엌쪽 불은 켜져 있었지만 식당 내부는 어두웠고, 손님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장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메뉴판에 <영양탕>이라고 적혀있기에 역시나 건너뛰었다. 아직 날이 추워 길게 생각하지 않고 들어간 근처 순두부집은 전부 국내산 재료를 사용한다는 문구에 호응이라도 하듯 예상보다 비쌌는데, 흰 초두부 메뉴는 구천 원이었고 짬뽕 손두부 메뉴는 만 원이었다. 가격이 신경 쓰였으나 달리 갈 곳도 없었다.
푸짐한 손두부가 가득 담긴 접시와 함께 솜씨 좋은 밑반찬이 과하게 딸려 나왔다. 반찬의 양을 좀 줄이고 가격을 줄이면 좋겠지만 식당의 셈법은 우리와 다른 듯했다. 흰 초두부는 고소하니 맛있었고, 짬뽕 손두부는 조미료 맛이 과하게 났다. 조미료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미원은 평생토록 먹을 수 있다.), 매운 조미료는 늘 뒤탈을 불러왔기에 조심하는 편이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음에도 역시나 밑반찬이 남았고, 사장님께 남은 음식을 포장해달라고 요청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자연보단 사람에게 밉보일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시간 맞춰 들어와 회의를 하고 오후 업무를 진행하는데 오후 세 시쯤 속이 쓰렸다. 역시나 매운 조미료 탓이다. 어찌어찌 배를 움켜쥐며 계획한 업무를 마치니 퇴근 시간이 되어 재빠르게 노트북을 끄고는 시내로 향했다. 대형 마트에서 모니터 연결선과 함께 앞으로 약 이 주동안 먹을 간식거리를 둘러보다 시리얼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챙겨 온 시리얼은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하고 바닥날 예정이지만 마음에 드는 제품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자고로 시리얼은 그릇에 담기 전에 먼저 액체류(우유, 두유, 아몬드유 등)를 따른 뒤 조금씩 부어먹어야 마지막까지 바삭하게 먹을 수 있고, 이와 관련하여 소싯적에는 제품별로 최적의 바삭함을 즐기기 위한 나만의 비율도 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유를 마시면 예외없이 찾아오는 속쓰림이 소화 장애임을 깨달은 뒤부터 한동안 시리얼을 먹지 못했는데, 수년 전 친구가 아몬드유를 추천해준 덕에 다시금 시리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유와는 사뭇 다른, 예상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다. 마트 시리얼 코너에서 예전에 즐겨먹던 제품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시리얼의 세계에서 벗어난 그 몇 년 동안 확실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했다. 시리얼 대신 영화를 보며 먹을 과자와 건어물류를 담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의 영화는 <크루엘라>로, 어딘가 아쉬운 디즈니 플러스에서 그나마 볼만한 몇 안되는 영화였다. 이 역시도 코로나로 인해 이제껏 미룬 작품이다. 이토록 영화를 매일 볼만큼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골에서 비 오는 날 해가 떨어진 이후에 즐길 수 있는 선택지를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본 작품에서는 크루엘라를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알고자 하지도 않았던 매력의 인물로 그려냈다. 마치 아몬드유와 같이 이를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범위의 매력일 것이다. 관심을 갖지 않아도 착실히 변해온 시리얼처럼 감정과 감각을 일깨우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