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강원도

강원도 양양 보름살이 - 7일차

가별 2022. 4. 9. 11:13
728x90
반응형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하얗게 뒤덮였다. 일기예보가 적중하여 추운 날씨에 눈까지 내려 오늘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는 집안일을 시작했다. 보통 비수기에 숙소를 구하기 수월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숙소에는 통돌이 세탁기가 있었는데 간만에 직접 세제를 넣으려니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세제 자동 투입>과 같은 신식 문물이 주는 편리함에 다시 한번 감사를 느낀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어젯밤 편의점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초콜릿의 은박 포장지를 뜯으며 차를 끓였다. 쉽게 뜯어지는 포장지만큼 가까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생긴 습관 중 하나는 공산품의 원재료를 살피는 것으로, 당시 느리게 식사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부터 시작됐다. 어찌나 느리게 먹던지 점심시간으로 주어진 90분을 알뜰하게 사용하였으므로 기다리는 시간을 때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점심시간까지 공부할 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았고, 타지 생활에서 친구는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그때부터 급식으로 나오는 요플레나 빵과 같은 공산품의 성분을 하나씩 읽기 시작하면서 생전 본 적이 없는 단어들과도 마주한 덕분에 세상이 조금 깊어졌다. 급식에 공산품이 포함되지 않은 날에는 반찬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며 없는 맛을 쥐어짜내기도 했는데, 미식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급식판이 마르도록 친구들을 기다렸던 나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먹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고, 그 습관이 아직까지 이어져 가끔 아내로부터 독촉을 받곤 한다. 옛날 생각에 잠겨 초콜릿 포장지에 적힌 원재료를 살피다 문득, 이 습관이 '입으로 들어와 나의 몸을 구성할 성분들을 통해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복잡한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생긴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초콜릿을 다 먹고 포장지를 동그랗게 구기니 손톱만하게 작아졌다. 우리는 어떻게 이리도 작은 쓰레기들을 모아 주기적으로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채우는지 궁금해짐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살아냄을 위해 오래가지 못할 죄책감이지만, 조금 더 현명하게 소비를 줄여야겠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나의 즐거움이 생겼고, 알루미늄 포일이 생긴 것일까. 혹은 거대한 에너지 순환의 일부일 뿐으로 인류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익숙한 환경에서 오래도록 살고 싶은 마음이다. 

유리창에 낀 성에 너머로 잔잔하고 커다란 바다가 보인다. 화가들은 이 신비를 어쩜 그리도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세상을 글로든 그림으로든 담아내는 것도 능력이겠으나, 이를 즐기기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삶에서 경험이 적으면 아무리 멋진 표현도 그저 종이에 묻은 잉크, 혹은 무작위로 배열된 색의 조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재즈나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직접 악기를 배우고 나서 합주를 해보는 것이며, 여행기가 재밌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행을 많이 다니거나 다른 글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감각을 쌓음으로써 글만 읽고도 풍부한 생각이나 감정이 떠올라야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예술이나 문학은 어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내게는 그림의 능력이 없는 대신에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 비법을 꼽자면 요리책에 적힌 계량과 설명을 상당히 정확하게 따르는 것과 더불어 다년간 자취를 하면서 겪거나 목격한 여러 실패로부터 경험이 쌓인 덕분이다. 물론, 오랜 시간 공산품의 성분을 살핀 것과 재료마다의 특징을 파악해온 것도 한몫을 차지한다. 예컨대, 팬케익을 만들 때 식용유가 없다면 대부분 식용유로 이루어진 마요네즈를 활용해볼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아내에게는 그림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는 능력(내게는 비참할 정도로 없으므로 더욱 매력적이게 다가온다.) 외에도 수면의 능력이 있는데, 낮잠을 쉬지 않고 한나절 넘게 잘 수가 있다. 이제 실험 삼아 마요네즈로 구운 팬케익을 들고 가 낮잠을 즐기는 아내를 조심스레 깨울 계획이다.

728x90
반응형